농사일기

박완서 청복(淸福)

이천기 2016. 3. 17. 06:48


청복(淸福)  박완서

                                                          

아침에 식구들을 다 내보내고 나서 혼자서 마시는 커피맛처럼 좋은 게 없다.

쓸쓸하면서도 감미롭고 텅빈 것 같으면서도 충일한 것 같은 느낌을 맛보게 된다

그 시간을 천천히 그러나 지루하지 않게 누리기 위해 아침 일은 될 수 있는 대로 서둘러 하게 된다.

할 일을 조금이라도 남겨 놓거나 대강대강 하면 마음이 꺼림칙해서 차맛이 뚝 떨어진다.

둘레에 지저분한 거나 비뚤어진 게 눈에 띄어도 차맛은 없어진다.

물론 몸이 거북하거나 아침밥을 너무 많이 먹거나 안 먹어도 차맛이 덜하다.

그러다 보니 한잔의 커피맛을 위해서 자꾸만 까다롭게 되고

창 밖의 풍경, 햇볕에까지 신경이 써지고 결국 만족할 만한 차맛에 도달하기는 점점 더 어렵게 되고 말았다.

심지어는 아침에 방문객이 있어 같이 차를 맛시게 돼도

차맛이 감소되어 아침 커피는 어떻게든 혼자서 마시려는 괴벽까지 부리게 됐다.

어떤 즐거움이든지 너무 탐닉하게 되면 사람이 치사해지는건 한잔의 차라고 해서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재미마저 놓치고 싶지는 않은 게 실상 나는 너무 괴벽이 없는 편이라

그 정도의 괴벽쯤 크게 흉될 건 없을 것 같았고,

남의 눈에 띄거나 남에게 해될 게 없는 건 괴벽이랄 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침 식후뿐 아니라 커피는 하루에 서너 잔 이상 마시는 편이었다.

밖에 나가 사람을 만나면 으레 커피를 마셨고,

집에 있을 땐 대게 온종일 원고지와 씨름을 하는데 막힐 때마다 애꿏은 커피를 마셔댔다.

커피를 마신다고 막힌 게 뚫리는 것도 아니고 아침 식후처럼 감칠맛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버릇이었다.

뭔일이 잘 안될 때 담배를 퍽퍽 피워대는 사람도 이해할 것 같았고,

그게 커피 마셔대는 것보다 훨씬 멋있는 것도 같아

나도 커피 대신 담배를 피워볼까 시도 안해본 것도 아니지만 그게 잘 안됐다.

쓰나 다나 커피였고 남들은 커피를 많이 마시면 잠이 잘 안 온다든가

소화가 잘 안된다든다하는 부작용이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신경도 위장도 남달리 튼튼해 밥 잘 먹고 잠 잘 잤다.

이렇게 무딜 정도로 튼튼한 신경도 견디어내지 못할 만큼 커피를 마신 적이 있는데

몇 년 전 조선호텔 커피숍에서였다.

근래엔 거기 간 적이 없어 요새도 그런지 모르지만

그때는 오래 앉아서 얘기하고 있으면 웨이터가 빈잔에다 얼마든지 커피를 더 따라주었다.

찻잔도 보통 다방의 세 배는 되게 큰 데다 가득 가득 채워주는 대로 나는 마셔댔다.

그땐 무슨 일이었는지 친구와 나는 거기서 다섯 시간쯤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동안 몇 잔의 커피를 마셔댔는지 정확한 숫자는 생각나지 않지만

그날 시장에 들러 뭘 사려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손끝이 떨리고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어 간단한 돈계산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나 같지가 않고 붕 떠서 제멋대로 부유하고 있는 게 허깨비처럼 눈앞에 어른대기도 했다.

내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나로부터 분리돼나간 것 같은 느낌은 두렵고도 고약했다.

나는 그 날 무진 애만 쓰다가 결국 볼일을 하나도 못 보고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일이 있은 후 비로소 사람들이 말하는 커피의 과음의 해독에 대해 수긍하는 마음이 생겼으나

원고 쓰는 동안은 뭔가를 마셔대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은 여전했다.

남들이 좋다는 잎차, 결명차, 구기차 같은 걸 구해서 커피 대신 마셔보려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기호품을 바꾸는 건 쉽지 않았다.

기호품은 어디까지나 기호품일 뿐이지 거기서까지 영양가니 해독이니 따진다는 게 치사하게도

여겨졌다.

술 담배가 지나치면 몸에 해롭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것 없이 삶이 무의미한 사람에게 그걸 끊으라는 건 식물인간 노릇을 하라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삶의 질과 양이 상극할 때 질 쪽을 택하는 게 좀더 멋있어 보이는 게

이 나이까지 남아 있는 나의 치기(稚氣)이다.

이렇게 일편단심 좋아하던 커피맛이 별안간 싫어진 일이 있는데

작년 말부터 금년 초에 걸쳐 한 달이나 넘게 독감을 앓을 때였다.

참으로 지독한 감기였다.

고열과 가래와 콧물과 두통이 함께 또는 번갈아 떠나지 않는데

앓이가 진력이 나고 힘들어 죽고 싶단 생각을 심각하게 할 정도였다.

그래도 약 먹고 밤에 요행 잠을 좀 자면 아침엔 기분이 한결 나아져서

식후의 그 고독하고 감미로운 커피맛을 즐기려면 웬걸, 쓰기가 소태였다.

당장만 쓴 게 아니라 온종일 쓴맛이 입 속에 늘어붙어 가뜩이나 감퇴된 입맛을 엉망으로 잡쳐놓았다.

담배 피는 사람이 흔히 건강이 안 좋을 때 담배맛 먼저 없어진다고들 하는데

그 말뜻을 그제서야 알아들을 것 같았다.

나는 마치 내 길고 긴 감기에 도전하듯이, 아니 아부하듯이,

매일 아침 한잔의 커피를 맛보았지만 감기는 완강하게 도사리고 악랄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지루했고 두려웠다.

감기가 지루하고 두려운 것도 같았고, 커피맛 없는 하루하루가 그런 것도 같았다.

생활의 리듬이 엉망이 된 것도 독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식후의 커피맛을 잃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커피맛은 잃었는데로 때때로 뭔가를 마시고 싶은 욕구는 여전했다.

욕구라기보다는 버릇이어서 마셔야 할 때가 되면 어쩔줄을 몰랐다.

그래서 마시기 시작한 게 잎차였다.

커피를 너무 마시는 게 몸에 안 좋다는 걸 막연히 느끼고부터 잎차도 더러 마셔봤지만

그 맹물 같은 밍밍한 맛은 좀처럼 당기지 않았었다.

또 손님에게 권하려 해도 그 까다로운 의식이 귀찮은 생각부터 들었다.

차의 으뜸가는 맛은 편한 휴식감인데 마시는 법이 그렇게 까다로워 부담이 된다는 데는 저항감마저 느꼈다.

그런데 독감을 앓으면서 혼자서 내 편한 대로 찻잔에 잎차 몇 잎을 덜어내서

더운 물을 붓고 잎차가 가라앉은 다음 천천히 마시니 그 밍밍한 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밍밍한 맛이 오랜 감기로 균열이 생긴 거처럼 아픈 목을 순하게 어루만지고

입 안 가득 은은한 향기를 남겼다.

커피의 그 짙은 향기도 못 맡게 코가 꽉 막힌 지 오랜데

보통 때는 향기가 있을랑말랑하게 희미하던 잎차 향기를 맡을 수 있을 줄이야.

나는 한 번 우려낸 잎차에다 다시 더운 물을 부었다.

두 번째 맛은 밍밍한 게 더욱 밍밍해졌지만 향기는 한층 깊어진 것 같았다.

그거야말로 향기였다.

거기 대면 커피는 냄새에 지나지 않았다.

잎차의 맛은 향기의 맛이었다.

코가 막혀도 향기가 직접물에 녹아 혀에 와닿았다.

잎차의 첫잔도 좋지만 두 번 세 번 우려낸 잔도 좋다.

마치 천천히 사라져가는 향기를 좇듯이, 끊긴 음울의 여운을 좇듯이 마시는 네 번째 잔도 좋다.

잎차의 맛을 독감과 함께 알게 됐다는 걸로 지난 독감은 나에게 의미심장했다.

체력의 한계에 대해 생각했고, 늙음을 좀더 친근하게 느꼈고

생로병사의 굴레에 순명하는 게 아름답단 생각도 하게 되었다.

어느날인가 두 번째 우려낸 잎차를 마시다 보니 찻잔 한가운데 작은 꽃이 활짝 핀 게 보였다.

꽃의 크기는 라일락 꽃송이를 이룬 작은 통꽃 한 개만 한데

꽃잎이 하나도 이지러지지 않고 온전했고 정결한 미색이었다.

그뿐인가, 한가운데는 꽃술이 주황색으로 선연했고 꽃받침은 갓 돋아난 새싹처럼 연연한 녹두색이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마시고 있는 게 얼마나 신비하고 아름다운 것의 정기(精氣)인가를 알고 숙연했고

황홀했다.

그리고 차를 마시는 법이 까다로운 까닭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비하고 아름다운 것의 정기를 마시는 은총에 대해

저절로 우러나는 경건한 몸가짐이 그런 예절을 만든 게 아닐는지.

요샌 독감도 다 나았건만 거의 커피를 안 마시고 잎차를 마신다.

정식으로 배우진 않았지만 내 나름으로 예절도 갖추고 마신다.

잔도 커피잔으로 마시던 걸 잎차잔으로 바꾸었다.

도예를 하는 막내딸이 빚어 구운 잎차잔은 모양도 좋지만 빛깔이 따습고 너그러운 유백색이어서 정겹다.

요즈음 많이 나와 있는 백자가 대개 차가운 청백색인 데 비해 그게 유백색인 게 난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딸아이의 예쁘고 가냘픈 손이 그걸 빚고, 정과 사랑이 풍부한 마음이 그런 빛깔을 내었거니 싶어서다.

그 유백색잔 한가운데서 차꽃이라도 피어나는 날이면

나는 내가 지나친 사치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과람하기조차 한다.

내 아직 딴 사치한 게 없으니 부디 과람하지 않은 청복(淸福)이길 빈다.

오래 청복을 누리고 싶다.